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리앙 디블랭 (문단 편집) === [[제3차 십자군 원정|3차 십자군]]과 그 이후 === 이후 1190년 예루살렘 왕국의 남은 땅인 아크레 공성전에 참가하였고 [[리처드 1세]]가 도착한 이후 3차 십자군에 참가하며 크고 작은 공을 세웠다. 이 기간에 여왕 시빌라가 사망하자 또 다시 왕권분쟁이 벌어졌다. 발리앙의 양녀 이사벨라가 이번에도 후보로 올랐지만 [[기 드 뤼지냥|기]]가 왕위를 내놓지 않았고, 이사벨라의 남편인 토롱의 옹프루아 역시 기에게 계속 충성할 것을 맹세하는 바람에 또 다시 물거품이 되었다. 결국 발리앙과 마리아는 이사벨라를 옹프루아와 이혼시키고, 몬페라토의 콘라드와 재혼시켰다.[* 옹프루아는 정치적인 욕심도 없었고, 인격적으로도 괜찮은 사람이었고 이사벨라와의 사이도 썩 좋았다. 발리앙이 양녀와 사위를 배신하고 강제로 갈라놓은 것에 가깝다. 그러나 발리앙도 할 말이 많은 처지였는데, 무엇보다도 둘 사이에 아이가 없었다. 이사벨라는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였으므로 자식이 없는 것은 심각한 위험요소였다. 또한 옹프루아는 [[르노 드 샤티용]]의 양자로서, 양부와 자신의 파벌에 대한 의리를 철저히 지켰는데, 하필이면 이 르노란 작자는 또라이 중의 상또라이였고 그 파벌이 편들었던 기 왕은 운빨로 왕위에 올랐을 뿐 답도 없게 무능한 작자였다. 즉 예루살렘 왕국의 존속을 책임져야 하는 발리앙의 입장에선 사이좋게 편을 먹은 그 두 사람이 최악의 발암 요소였는데, 왕위 계승권자인 이사벨라 공주의 남편으로서 문제 해결의 열쇠를 손에 쥔 옹프루아가 꼼짝도 하지 않으니 정말로 돌아버릴 지경이었을 것이다. 결혼을 개인 간의 관계로 보면 발리앙이 명색이 양아버지/장인이면서 폭거를 저지른 꼴이지만, 당시에는 결혼이 정치의 주요 수단이었으며 발리앙은 무능하고 호전적이기만 한 기+르노 연합에 맞서 왕국을 지키기 위해 콘라드를 지지하는 파벌을 만들어서 자신이 취해야 하는 정치적 행동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예루살렘 왕국의 왕권을 다시 한 번 주장하게 될 수 있었으나, 당시 [[제3차 십자군 원정]]을 이끌던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기 드 뤼지냥|기]]를 지지하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가 콘라드를 지지하면서 대립각을 세운 까닭에, 왕권분쟁은 쉽사리 해결이 되지 않았다. 결국 1192년 선거를 통해 콘라드가 차기 왕으로 선임되었지만, 공교롭게도 며칠 후 무슬림 암살단 [[어새신]]에게 암살[* 여기에 [[리처드 1세]]가 개입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지만 진위여부는 불분명하다.]당했다. 이후 이사벨라는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조카인 상파뉴의 앙리 2세(Henri II de Champagne)와 재혼하였고, 이에 따라 발리앙은 앙리 2세의 고문역이 되었으며 야파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나중에 리처드 1세의 사절로 임명되어, 살라딘과 만나 람라 조약을 성사시켰다. 이를 통해 원래 영지인 이벨린은 영구히 상실하게 되었지만, 살라딘은 리처드 1세가 탈환한 해안가 지역을 기독교도의 영토로 인정하였고, 그중에서 아크레 외곽의 케이몽(Caymont)과 그 인근 지역을 발리앙의 영지로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3차 십자군 원정이 마무리 된 그해 [[1193년]]에 사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